

참전 전사(戰史)
1950.6.25.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사 생도 1,2기 539명은 육본 작전명령 제90호에 의해 생도 전투대대로 편성되었다. 생도들에게는 개인별 실탄 50여발, 수류탄 1~2발이 지급되었고, 대대는 교육용 기관총 몇 정 보유한 상태로 포천 부평리 372고지에 투입되어 포천~의정부 지역으로 공격하는 적 3사단 병력에 맞서 치열한 접전 끝에 적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생도대대는 372고지 동쪽에 배치되었던 경찰대대가 돌파당하면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철수를 개시, 태릉지역 담터고개~육사영내 92고지를 점령하여 서울을 우회 공격하려는 적 3사단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적이 의정부 축석령 고개를 돌파하고 창동 지역에까지 진출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적의 측방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생도들이 전사하였다.
태릉에서 철수하던 일부 생도(13명 : 생도 1기 10명, 생도 2기 3명)는 퇴각하던 9연대 장병 7명과 함께 불암산 지역에서 호랑이 유격대를 결성하고 적 후방교란, 보급기지 타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6월 29일 태릉지역에서 철수한 생도 전투대대는 한강변 천호리 방어선에 투입, 측후방 경계와 피난민 통제를 통해 전선을 유지하였으며, 6월 30일에는 아군 3사단과 함께 금곡리(판교)에 투입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7월 1일에는 적의 화력에 밀려 철수를 시작, 7월 4일 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이동하였으며, 7월 10일에 생도대대는 해체되었다.
6·25 전쟁 초기 서울지역 전투 중에 생도 151명이 전사했으며, 전쟁 기간 중 참전한 539명 중 45.45%인 24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생도 1기 장만근, 김해선, 박창읍, 강주봉 등 4명의 생도는 적의 총탄에 큰 부상을 당하자 부축하는 동기생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자결하기도 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피워보지도 못하고 국가를 위해 주저없이 목숨을 바쳤으나,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생도1·2기는 후손들이 길이 기억해야 할 진정한 전쟁영웅이라 할 것이다.
참전 전투
포천 내촌면 부평리 372고지 전투(1950.6.25.~6.26)
태릉지역 담터고개~육사 영내 92고지 전투(1950.6.26.~6.28)
한강방어선 천호리 지역 투입(1950.6.29.~6.30)
수원 금곡리(판교)지역 전투(1950.6.30.~7.4)
공적 출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제2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더 자세한 내용은 자료실의 “6·25전쟁 과 육사생도 1•2기”(나종남 육사교수)발표자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