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활동

초기 전투와 생도 1•2기 참전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파주~문산축선)과 동두천,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점령후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였다.

특히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은 국군의 7배가 넘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국군의 후방 주둔 사단이 전방으로 속속 투입되었으나 역부족이었으며, 수도 서울이 점령당할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포천전투에서 전차를 상대로 관총과 열세한 대전차포가 전부였던 7사단(구 수도사단) 9연대가 전차를 앞세운 적에게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 태릉지역의 육군사관학교에 집결하자,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육군본부로부터 접수한 명령에 의거 생도들을 현역부대와 함께 전투부대로 편성하여 전방에 투입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1949년 7월 5일에 입교(338명)한 생도 1기 262명이 교육 중이었고, 졸업행군을 앞두고 6.24(토) 전원이 외박 복귀중이었으며, 생도 2기는 1950년 6월 1일 입교(334명)하여 277명이 제식훈련, 총검술, 사격훈련을 마치고 영내 대기중이었다.

이준식 준장은 우선 생도 1기 262명과 생도 2기 277명 등 총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해 (구)수도사단 9연대 1대대와 합세 후 6월 28일까지 내촌-태릉 전투를치렀으나 극심한 전력차를 극복할 수 없어 서울 수비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육사교장 이준식은생도대대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생도들은 뒤늦게 철수하다가 북한군의 추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편성

이당시 김동원 생도 1기는 태릉 전투를 치르던 중 철수 명령을 입수했지만, 이대로 후퇴하기만 하면 적의 기세만 올려주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 판단하고는 서울에 남아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1기 동기생 및 후배들을 규합했다. 그들은 총 13명으로, 생도 1기 김동원, 전희택, 홍명집, 박인기, 김봉교, 박금천,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강원기 등 10명과 생도 2기 3명(신원 미상)이었으며, 김동원 생도는 이들과 함께 불암사로 향했다.

불교 신자였던 김동원은 평소 불암사를 자주 방문하면서 친분을 쌓고 있었던 윤용문 주지스님에게 유격활동 계획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윤용문 스님은 기꺼이 도와주기로 하며 이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했다. 이후 불암산 기슭에 배치되었던 9연대 소속의 부사관 2명과 병사 5명이 합류하면서, 총 20명이 불암사에 집결하였다.

6월 28일 불암사에 집결한 생도 및 9연대 소속 장병들은 암호명을 ‘호랑이’로 정하고, 유격대장으로 김동원 생도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이후 유격대장은 각 조장을 임명했는데, 제1조장에는 조영달 생도, 제2조장에는 박인기 생도, 그리고 제3조장에는 9연대 소속 부사관인 김만석 중사가 임명되었다.

<불암사 전경>

<석천암>

또한 정보책으로 홍명집 생도를 임명하여 윤용문 주지스님과의 접촉을 전담하게 했다. 윤용문 주지스님은 주변 마을의 믿을만한 신도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유격대에 전달했고, 불암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석천암의 김한구 스님은 유격대가 숨어서 지낼 수 있는 동굴 몇 곳을 안내했으며, 여러 차례 식사를 제공하는 등 유격대 활동을 지원했다.

생도들은 대부분 소총과 수류탄만 가지고 입산했지만, 9연대 소속 부사관 및 장병 7명이 소지하였던 기관총 3정, 수류탄 50여 발, 탄약 3,000여 발을 추가로 확보한 후 유격대의 구성 취지의 결의를 담은 ‘유격대 활동수칙’을 정했다.

첫째, 우리 유격대는 전원이 결사의 각오로 유격 활동에 임할 것을 다짐한다. 그것이 후일에 전쟁을 기피했다는 누명을 벗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겠다.

둘째, 우리 유격대는 병력과 그 장비의 규모로 보나 본래의 목적으로 보나 적 병력의 살상이나 보급품, 기타 시설 장비의 파손보다는 적 교란을 주 임무로 한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는 가능한 유격활동의 범위를 넓혀 적 병력의 분산과 유인으로 그들의 일선 투입을 적극적으로 방해할 것을 다짐한다.

셋째, 우리 유격대는 자체 진지를 불암산과 그 북방 12km의 수락산 및 동북방 9km의 국사봉에 두고, 그 곳을 전진하면서 적의 수색을 피하기로 하고, 또한 그곳에 잠입한 반공인사와 접촉하여 그들의 지원도 받기로 한다.

넷째, 우리 유격대는 서로 강요당해 집결한 집단이 아니므로 기탄없는 의견과 토론은 환영하는 바이지만, 일단 결정된 사항에는 복종할 것을 다짐하며, 만약 이탈자나 결정을 어긴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천명한다.

주요 전투

①퇴계원역 전투 :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첫번째 목표는 퇴계원에 위치한 북한군의 보급물자 적치장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전선으로 가능한 빨리 보급물자를 보내기 위해 퇴계원역 주변에 다량의 보급품을 쌓았다. 7월 5일과 8일 야간에 생도 2명이 민간인 복장으로 사전 정찰을 실시해,북한군 야적소의 규모와 경계병력, 적재 물품의 종류와 위치 등을 확인했다. 7월 11일 새벽, 대원들은 주력조와 지원조로 나눠서 퇴계원의 북한군 보급기지를 급습했다. 그들은 그곳에 쌓여있던 보급품을 불태우고, 북한군 약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하지만 철수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의 추격으로 생도 1기 김봉교, 박인기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생도 2기 1명 등 3명이 전사했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을 입었다.

②창동지역 전투 : 두번째 목표는 창동국민학교와 인근에 설치된 북한군 수송부대 및 보안소였다. 7월 31일, 유격대원 6명이 출격하여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북한군의 숙영지, 보급 차량, 보안부대 사무실 등을 습격했으나, 퇴각 도중에 북한군의 추격으로 작전 입안자였던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③육군사관학교 전투 : 세번째 목표는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였다. 당시 육사는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 훈련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는 육사를 습격해 북한군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이들을 탈출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육사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보다 치밀하고 세세한 준비가 필요했다. 유격대는 구체적인 공격 방향과 철수 방향을 설정했고, 습격 이후에는 적이 불암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할 것을 예측해 수락산의 반공인사 은거지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또한 이번 공격에는 그때까지 생존한 15명 전부 참가하기로 한후 8월 15일 밤, 유격대는 야음을 틈타 육사 부지를 급습했다. 그들은 교도대와 생도대 막사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했고, 혼란에 빠진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북한군 약 50여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철수하던 중 유격대장 김동원을 비롯해 6명의 생도가 전사했다.

<주요전투 요도>

<참전생도 철모>

④내곡리 전투 : 9월 15일 수락산에서 불암산으로 돌아온 유격대는 정보원으로부터 북한군이 불암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과정에서 윤용문 스님을 연행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에 그들은 동굴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던 9월 21일, 불암산에 입산한 정보원이 북한군이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및 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주민들을 화물차에 싣고 북쪽으로 끌고 갈 계획이라고 알렸다. 유격대장 조영달 생도는 주민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실시할지를 놓고 대원들과 논의했다.

     당시 유격대가 보유한 장비는 개인별 소총 1자루와 실탄 10여 발 뿐이었다. 이 정도 무장으로 작전을 감행하는 건 자살행위였고,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불암산에 숨어있는 게 현명해 보였다. 하지만 대원들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판단, 주민 구출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9월 21일 밤, 대원들은 내곡리 마을 주변까지 이동한 뒤 도로 주변에 매복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 수송부대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23시경, 내곡리를 출발한 북한군 수송대가 매복진지 앞을 통과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소총을 쏘면서 습격했다. 이때 조영달 생도가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육사생도들이오. 여러분은 어서 피하시오!”라고 외쳤다. 이에 많은 이가 여러 방향으로 달아나 북한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탄약을 모두 소모한 뒤 도망쳐 불암산으로 복귀하려 했지만, 북한군의 추격으로 강원기 생도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태릉지역은 6.25전쟁 당시 육사생도 1․2기들이 불암산 등 일대에서 적들의 침략에 맞서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한 위국헌신의 순국지이자 호국안보의 성지이다.

전투간 은거동굴

불암산에는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가 은거하며 활동했던 3개의 자연동굴이 있는데, 석천암 김한구 스님이 알려줘 은거지로 활용했다. 호랑이 유격대는 은거동굴을 유격거점으로 삼았으며, 네차례의 습격 작전간 작전 회의 및 전투휴식과 정비할 수 있는 후방기지로 삼았다.

육사와 남양주시는 지난 1996년 3개의 동굴 입구에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안내판“을 설치하고, 불멸의 육사혼과 호국보훈의 의미를 기리고 있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1950년 6월 28일부터 1950년 9월 21일까지 생도1,2기가 내촌-태릉 전투를 치르고 육사로 후퇴하며 92고지 전투 이후 분산 철수시 “이 곳에 남아 끝까지 싸우자”며 불암산에 은거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하다 장렬히 전사한 육사생도와 7사단 9연대로 구성된 유격대를 지칭한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생도 1기) 등 생도 1기 10명, 생도 2기 3명, 기타 7명 (7사단 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병사)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이름은 유격 작전 간 ‘호랑이’를 암호로 사용하여 붙여진 것이다.

참고자료